그룹명/사람이야기

식은 밥~

언덕위에 서서 2007. 4. 15. 18:05
1.
어머님은 꺼먹 솥 안에 항상 식은 밥을 준비해 두셨다. 큼직한 스텐그릇에 수북하게 담아서~
보리가 반 넘어 섞인 밥인지라, 식으면 시커매 지고, 떡이 지고, 입안에선 껄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긴긴 여름 날, 내리 쏟는 햇살아래 터벅터벅 아스팔트길을 걸어 집에 도착하면,
온 몸은 쳐질대로 쳐지고, 휑한 눈에 그저 뭐, 먹을 것 좀 없나? 하는 생각 뿐인데~

그럴 때 무쇠 솥 안에 당연히 준비돼 있는 식은 밥~~~ 그 든든한 믿음.
펌프질 한참해서 미지근하고 쇳내나는 윗물 다 퍼내고, 시원한 물에 밥 말고, 아침에 햇살을
피해 뒤뜰에 옮겨둔 옹기장독에서 열무김치 한사발 꺼내 한 입 가득 밥을 채웠을 때의 그 만족감이란.

반쯤 남아있는 밥은, 긴긴 여름 날, 남의 밭 매다 돌아온 어머니가, 저녁 짓기 전 허기를 달래려
또 그렇게 드실 몫이었다. 아님 나보다 먹새 좋은 동생 녀석 차지가 되거나~~

그 여름날~~
열평 남짓한 그 흙벽돌집에는 어쩌다 하루 햇살 피할 구석마저 없었을까?

워낙 동작이 기민한 어머니는 품팔러가는 와중에도
하루 날 잡아 부지런히 김치 담그고, 그걸 옹기에 담고, 다시 새 물 채운 뻘건 고무다라에 담가
두셨다. 그 짐을 아침엔 집 뒤에 두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 다시 집 앞쪽 옹색한 그늘로
옮기곤 하셨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름김치 사나흘이면 완전 식초가 되곤 했지만~~

세월이 흘러, 전기밥솥 생기고, 냉장고가 생겼어도, 어머닌 여전히 집안에 밥을 준비해 놓으셨다.
어쩌다 집에 들르는 아들에게, 된장만 끓이면 금방 밥과 차려 주기 위해서~~~~

젊은 아들이 훌쩍, 훌쩍 맛있게 된장국물 퍼 먹는 걸 지켜보실 땐, 아직 눈도 밝고
온 몸에 탱탱한 젊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손자 녀석이 “할머니, 매운 된장 끓여주세요”
하고 조를 땐, 이미 당신은 고혈압과 당뇨로 눈 어둡고, 기력 쇠해진 뒤였다.

물론 손자녀석 밥숫갈 큰 거 지켜보는 기쁨이야 자식 것의 두 배, 세 배였겠지만~~~


2.
아침에 일어나면 두 내외가 정수기 앞에서 물을 한잔씩 마신다. 나는 습관적으로 남은 물을
싱크대에 버리는 데, 어느 날 문득 보니, 이 사람은 물 끓이는 주전자에 남은 물을 붓는다.

어이쿠야, 이게 내가 장가 잘든 것이 맞구나. 그나마 이 나이에 집 한 칸 마련하고,
집안 대소사에 장남노릇하며 살 수 있는 게 다 알뜰한 이사람 덕이구나~~~

그 날 이후, 컵에 담긴 물을 끝까지 다 마시려 노력한다.

수시로 혈압을 재던 아내가, 몇 달 만에 병원엘 다녀왔다. 열이 나고 얼굴이 붉어지며,
목뒤가 뻣뻣한 것이 폐경 증후군인가 보다고 혼자 말을 하더니만, 벌컥 혈압약 처방을 받아왔다.
150/100 이라고, 당장 혈압약부터 복용하라고 하더란다.

그럴 만도 하지, 하루 3시간씩 고속도로 운전하길 벌써 5년째 아닌가? 4년된 차가 20만 킬로를
넘어 갔으니~~~ 사람 몸에 무리가 가도 많이 갔겠지.

이젠, 그 엄마가 지어 놓은 밥을 늦게 일어난 아들이 점저로 챙겨 먹는다.
냉장고며, 가스렌지에 올려놓은 찌게며, 그 옛날 허기진 배를 채우려 한 입씩 우겨 넣던
내 보리밥과 비교할 수야 없겠지만,

홀로 앉아 밥 먹고 있는 아들 모습이며, 혈압과 함께 흰머리 늘어가는 아내를 보니,
세상이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이구나 하며 불현듯 많은 것들이 생각키운다.

올 한식 때도, 부모님 산소엔 가 볼 생각도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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