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군인들은 일반공무원으로 치자면, 국가직이다.
통상 2-3년마다 근무지를 옮기게 되는데 다음 근무지가 전국 어느곳이던
군부대가 있는 곳이면 다 해당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군생활 10년 넘게하고도
집 마련할 생각을 못한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 지역별로 군인아파트며, 독신자 숙소를 짓고, 이사 비용도
국가가 지급한다. 그렇게 안해주고 2-3년마다 서울에서 강원도 현리로 또 다시
충남 대전으로 가라하면 아마 요즘 세대, 군에 남아 있을 사람이라곤 없을게다.
그런 주거 시스템이 도움도 되고 毒도 될 수 있는데, 군인아파트에 사는 동안
월세 산다고 생각하고 알뜰히 모으면, 1년에 몇백만원 더 저축할 수도 있고,
당장 먹기 곶감이 달다고 먹고 즐기는데 쓰다 보면, 이사할 집 한 칸 없어,
전역하고도 몇개월씩 군인아파트를 떠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 경우, 관리비에 추가로 벌금이 부여되는데 벌금도 벌금이지만,
그 동안 쌓아올린 이미지에 먹물 튀는 건 당연지사다. 인간대접 받기 포기해야 한다.
전역을 1년쯤 남겨두고, 집을 마련하긴 해야겠는데,
생전 모델하우스를 가 봤나, 아파트 청약을 해봤나?
그런 곳이야 투기꾼, 복부인들이나 가는 곳이지, 나처럼 고고한 사람은
갈 곳이 아닌 것 같아 멀리하고 살았는데~~
어쩔 것인가? 마침내 용기를 냈다.
전역하고도 아파트 안 비워 눈총받고 있는 옆 통로의 누구 꼴 날까봐~~~
2.
어느날, 퇴근하는 길로, 군복을 입은채 모델하우스로 쫒아 갔다.
바글거리는 사람들이 전부 나만 쳐다 보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도 아니다.
다들 주방은 어떻고, 마감재가 어떻고, 집구경하느라 바쁘지, 옆사람에겐 관심도 없다.
그제서야 겨우 아파트의 구조며 넓이며, 마감재가 눈에 들어 온다.
하여간 좁고 구조 복잡한 군인아파트보단 훨~ 좋군.
24평, 36평, 44평, 넓기도 무지 넓군, 연신 감탄하며, 이곳, 저곳 돌아다니던 중
저만치에 퍼뜩 눈에 띄는 여인네가 있다.
" 앗~~~ " 기겁을하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얼마후 다시 고개를 돌려 찬찬히 살펴본다.
" 맞다~~~."
본인도 나를 알아본 듯한 눈치다. 아마 나보다 먼저 나를 알아봤을게다.
군복을, 그것도 아래,위가 붙은 조종복을 입고 있었으니, 더 쉽게 눈에 띄었을게다.
3.
내 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고등학교 때다.
등록금이 밀려 고2때 1년을 휴학한 적이 있었는데 (내탓이다, 그때도 장학금이 있었는데,
그걸 매학기 아슬아슬한 점수차이로 못 탔으니까)
그 시기에 교회에 예쁜 여학생이 나타났다.
예쁘기만한 것이 아니다. 철야기도 중 "방언"을 해 나를 포함한 학생회
건달교인들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신심도 깊었다.
" 쟤~~~내꺼, 너네, 다들 알았지, 관심 뚝, 응?"
" 알았어, 알아"
대충 이 정도로 회장인 내게 우선권이 인정되었다.
사실, 나를 제외하고 다들 사귀는 여학생이 있었던게 그 이유였지만~~
헌데 그 우선권도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다니던 학교에 자퇴원서를 내고,
돈 벌러 집을 떠났다.
태어나 학교 다니던 일 외에는 해보지 못한 고2에게,
그런 상황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는 겪어본 사람만 안다.
남들은 다 가는 학교, 왜 나만 못가냔 말이다.
4.
타지에 있는 친척의 두부공장에 취직을 하였다.
말이 취직이지, 이 등신이 생전 일을 해봤나 남의 눈치밥을 먹어봤나?
일도 못하는 게 고집은 있어 말은 안듣지, 가라했다간 집안에 의 끊어지겠지,
한마디로 "조카만 아니면, 확~~~~" 이 그 무렵의 내 처지였다.
게다가 밤새 두부 만들고 낮에 자야할 놈이 도서관에 간다고
책 들고 나서니 ~~~
내가 삼촌이라도 그런 조카놈 정말 미웠을 게다.
어쨌거나 시간이 가니 내손으로 간수도 치고(이게 가장 어려운 기술이다)
배달도 하고 제법 일꾼티가 나게 되었다. 몇푼 저금도 하고,
(그래서 지금도 집사람이 냉장고에서 며칠뙨 두부는 꼭 내 감정을 받는다.)
5.
그런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6-7개월 지났나?)
중학교 은사께서 학교에 들르라는 연락을 하셨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에
모교에 고등학교 과정이 생겼는데, 1년을 꿇고 나니 그곳에 갈 수가 있게된 것이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 가서 전학 절차를 밟고 오라는 것이다.
중학교 후배들이 대부분인 반에 들어가기가 어색하긴 했지만, 얼마나 감사했던지.
게다가 먼저 학교에 안 낸 등록금 걱정을 했는데, 그 돈 얘긴 안하고 전학증을 떼어줬다.
(후에 들어보니 내가 자퇴했기 때문에 누가 그 즉시 내자리를 차고 들어왔는데
학교 철제교문을 새로 만들어 놓고 들어왔다는 얘기가 들렸다.)
6.
그리고 오랫만에 교회에 갔다. 다들 모여 반가워 한다. 예의 그 여학생도~~
헌데 내 뒤를 이어 학생회장을 하는 A의 모습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예배 후 내가 그 여학생을 따로 좀 보자하니 A가 함께 남는다. 이상하다.
"어라~? 이것들이, 혹시 내 없는 새~~?" 아주 불쾌한 예감이 뇌리를 스친다.
셋이 남아 한동안 어색한 시간이 흐른 후, A가 이리, 저리 돌려 말하는데,
결국, 그 불쾌한 예감이 맞아 떨어졌다.
A 놈이, 두부 만들며, 천번도 넘게 머리속에 그렸던 나의 거시기를~
"그래~~~, 그럼 00는 들어가지, 남자들끼리 얘기 좀 하게~~ "
한참 후, 너무 꼴이 우습게 된 내가 한마디 한다.
여학생의 눈길이 A에게로 향한다.
"그래. 들어 가~~"
A의 허락이 떨어지자 조용히 자리를 뜬다.
"이런~~ 확~~~"
그 후 A와 둘이 긴 얘기를 했지만, 내 꼬인 가슴에 남은 것은
" 이 자식, 여자때문에 친구를 배신한 놈"이고~
" 이 기집애, 정조도 없는 것~"이 전부였다. 솔찍히~~
세월가고, 나이들고, 결혼하고
이제 고향인 원주가 아니라 춘천에 자리를 잡아야 될 처지에~
그 여학생, 아니 이젠 제법 나이 든 아줌씨를 다시 만난 것이다. 그 모델하우스에서~
아니, 뭔 속셈으로 춘천까지 따라온거야?
들리는 얘기론 남편이 A가 아니라니 속이 쬐끔 낫긴 하더만~
7.
지도 날 알아봤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지를 정조도 없다고 욕할 근거도 없다.
"쟤, 내꺼~~"는 내가 일방적으로 남학생(A를 포함해서)들에게 공표한 것이지
정작 당사자한테는
"야, 사귀자~" 소리 한번 못하고 떠났으니까~~
그러니 자기도 내게 죄책감 같은 것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니 애인이었냐구?" 하면 할 말 없다.
그럼에도 서로 아는 체 하기가 어려웠다.
세월이 더 흘러~~~
이제 모델하우스 구경다니는게 그렇게 낯 부끄럽지도 않고
그 친구 더 이상 그렇게 특별한 의미도 아니다.
춘천이 별로 큰 도시가 아니니~
언제 어디서고 또 만나겠지. 그 땐 아는 체 해야지.
더 늙어, 그 때의 그 애틋했던 기억마져 아주 잊혀지기 전에
만나서
"지난 번에 너 봤었다~" 고 얘기 해야지.
그게 또 모델 하우스가 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군인들은 일반공무원으로 치자면, 국가직이다.
통상 2-3년마다 근무지를 옮기게 되는데 다음 근무지가 전국 어느곳이던
군부대가 있는 곳이면 다 해당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군생활 10년 넘게하고도
집 마련할 생각을 못한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 지역별로 군인아파트며, 독신자 숙소를 짓고, 이사 비용도
국가가 지급한다. 그렇게 안해주고 2-3년마다 서울에서 강원도 현리로 또 다시
충남 대전으로 가라하면 아마 요즘 세대, 군에 남아 있을 사람이라곤 없을게다.
그런 주거 시스템이 도움도 되고 毒도 될 수 있는데, 군인아파트에 사는 동안
월세 산다고 생각하고 알뜰히 모으면, 1년에 몇백만원 더 저축할 수도 있고,
당장 먹기 곶감이 달다고 먹고 즐기는데 쓰다 보면, 이사할 집 한 칸 없어,
전역하고도 몇개월씩 군인아파트를 떠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 경우, 관리비에 추가로 벌금이 부여되는데 벌금도 벌금이지만,
그 동안 쌓아올린 이미지에 먹물 튀는 건 당연지사다. 인간대접 받기 포기해야 한다.
전역을 1년쯤 남겨두고, 집을 마련하긴 해야겠는데,
생전 모델하우스를 가 봤나, 아파트 청약을 해봤나?
그런 곳이야 투기꾼, 복부인들이나 가는 곳이지, 나처럼 고고한 사람은
갈 곳이 아닌 것 같아 멀리하고 살았는데~~
어쩔 것인가? 마침내 용기를 냈다.
전역하고도 아파트 안 비워 눈총받고 있는 옆 통로의 누구 꼴 날까봐~~~
2.
어느날, 퇴근하는 길로, 군복을 입은채 모델하우스로 쫒아 갔다.
바글거리는 사람들이 전부 나만 쳐다 보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도 아니다.
다들 주방은 어떻고, 마감재가 어떻고, 집구경하느라 바쁘지, 옆사람에겐 관심도 없다.
그제서야 겨우 아파트의 구조며 넓이며, 마감재가 눈에 들어 온다.
하여간 좁고 구조 복잡한 군인아파트보단 훨~ 좋군.
24평, 36평, 44평, 넓기도 무지 넓군, 연신 감탄하며, 이곳, 저곳 돌아다니던 중
저만치에 퍼뜩 눈에 띄는 여인네가 있다.
" 앗~~~ " 기겁을하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얼마후 다시 고개를 돌려 찬찬히 살펴본다.
" 맞다~~~."
본인도 나를 알아본 듯한 눈치다. 아마 나보다 먼저 나를 알아봤을게다.
군복을, 그것도 아래,위가 붙은 조종복을 입고 있었으니, 더 쉽게 눈에 띄었을게다.
3.
내 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고등학교 때다.
등록금이 밀려 고2때 1년을 휴학한 적이 있었는데 (내탓이다, 그때도 장학금이 있었는데,
그걸 매학기 아슬아슬한 점수차이로 못 탔으니까)
그 시기에 교회에 예쁜 여학생이 나타났다.
예쁘기만한 것이 아니다. 철야기도 중 "방언"을 해 나를 포함한 학생회
건달교인들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신심도 깊었다.
" 쟤~~~내꺼, 너네, 다들 알았지, 관심 뚝, 응?"
" 알았어, 알아"
대충 이 정도로 회장인 내게 우선권이 인정되었다.
사실, 나를 제외하고 다들 사귀는 여학생이 있었던게 그 이유였지만~~
헌데 그 우선권도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다니던 학교에 자퇴원서를 내고,
돈 벌러 집을 떠났다.
태어나 학교 다니던 일 외에는 해보지 못한 고2에게,
그런 상황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는 겪어본 사람만 안다.
남들은 다 가는 학교, 왜 나만 못가냔 말이다.
4.
타지에 있는 친척의 두부공장에 취직을 하였다.
말이 취직이지, 이 등신이 생전 일을 해봤나 남의 눈치밥을 먹어봤나?
일도 못하는 게 고집은 있어 말은 안듣지, 가라했다간 집안에 의 끊어지겠지,
한마디로 "조카만 아니면, 확~~~~" 이 그 무렵의 내 처지였다.
게다가 밤새 두부 만들고 낮에 자야할 놈이 도서관에 간다고
책 들고 나서니 ~~~
내가 삼촌이라도 그런 조카놈 정말 미웠을 게다.
어쨌거나 시간이 가니 내손으로 간수도 치고(이게 가장 어려운 기술이다)
배달도 하고 제법 일꾼티가 나게 되었다. 몇푼 저금도 하고,
(그래서 지금도 집사람이 냉장고에서 며칠뙨 두부는 꼭 내 감정을 받는다.)
5.
그런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6-7개월 지났나?)
중학교 은사께서 학교에 들르라는 연락을 하셨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다음 해에
모교에 고등학교 과정이 생겼는데, 1년을 꿇고 나니 그곳에 갈 수가 있게된 것이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 가서 전학 절차를 밟고 오라는 것이다.
중학교 후배들이 대부분인 반에 들어가기가 어색하긴 했지만, 얼마나 감사했던지.
게다가 먼저 학교에 안 낸 등록금 걱정을 했는데, 그 돈 얘긴 안하고 전학증을 떼어줬다.
(후에 들어보니 내가 자퇴했기 때문에 누가 그 즉시 내자리를 차고 들어왔는데
학교 철제교문을 새로 만들어 놓고 들어왔다는 얘기가 들렸다.)
6.
그리고 오랫만에 교회에 갔다. 다들 모여 반가워 한다. 예의 그 여학생도~~
헌데 내 뒤를 이어 학생회장을 하는 A의 모습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예배 후 내가 그 여학생을 따로 좀 보자하니 A가 함께 남는다. 이상하다.
"어라~? 이것들이, 혹시 내 없는 새~~?" 아주 불쾌한 예감이 뇌리를 스친다.
셋이 남아 한동안 어색한 시간이 흐른 후, A가 이리, 저리 돌려 말하는데,
결국, 그 불쾌한 예감이 맞아 떨어졌다.
A 놈이, 두부 만들며, 천번도 넘게 머리속에 그렸던 나의 거시기를~
"그래~~~, 그럼 00는 들어가지, 남자들끼리 얘기 좀 하게~~ "
한참 후, 너무 꼴이 우습게 된 내가 한마디 한다.
여학생의 눈길이 A에게로 향한다.
"그래. 들어 가~~"
A의 허락이 떨어지자 조용히 자리를 뜬다.
"이런~~ 확~~~"
그 후 A와 둘이 긴 얘기를 했지만, 내 꼬인 가슴에 남은 것은
" 이 자식, 여자때문에 친구를 배신한 놈"이고~
" 이 기집애, 정조도 없는 것~"이 전부였다. 솔찍히~~
세월가고, 나이들고, 결혼하고
이제 고향인 원주가 아니라 춘천에 자리를 잡아야 될 처지에~
그 여학생, 아니 이젠 제법 나이 든 아줌씨를 다시 만난 것이다. 그 모델하우스에서~
아니, 뭔 속셈으로 춘천까지 따라온거야?
들리는 얘기론 남편이 A가 아니라니 속이 쬐끔 낫긴 하더만~
7.
지도 날 알아봤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지를 정조도 없다고 욕할 근거도 없다.
"쟤, 내꺼~~"는 내가 일방적으로 남학생(A를 포함해서)들에게 공표한 것이지
정작 당사자한테는
"야, 사귀자~" 소리 한번 못하고 떠났으니까~~
그러니 자기도 내게 죄책감 같은 것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니 애인이었냐구?" 하면 할 말 없다.
그럼에도 서로 아는 체 하기가 어려웠다.
세월이 더 흘러~~~
이제 모델하우스 구경다니는게 그렇게 낯 부끄럽지도 않고
그 친구 더 이상 그렇게 특별한 의미도 아니다.
춘천이 별로 큰 도시가 아니니~
언제 어디서고 또 만나겠지. 그 땐 아는 체 해야지.
더 늙어, 그 때의 그 애틋했던 기억마져 아주 잊혀지기 전에
만나서
"지난 번에 너 봤었다~" 고 얘기 해야지.
그게 또 모델 하우스가 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