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戀書 75통 (그녀와의 추억)

40-84년

언덕위에 서서 2006. 1. 2. 16:33
 

19840823          대위 연세대 학부 위탁교육


온통 헤맨 방학은 이제 끝내기로 하자고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서울에 왔고, 전혀 그렇지가 못할 것 같아 잠간만이라도 보고

오자 싶어 전주행 버스를 탔고, 그리고 지금은 이래.

죽을 것 같애. 이렇게 헤매다가 어지럼증으로 미쳐버리거나

이렇지 않을 수가 있을 텐데 왜 이러는 지.

다시 태어나야지. 이제껏 살아온 이십팔년 다시 살아야 할 것 같고

그 동안 쌓아진 벽, 세워진 자존심, 덮여진 껍질.

모두 허물고 깨어져서 다시 살아나야겠는데

난 엄두도 못 내고 있고.

결혼 안한 여자가 남자의 아파트 방에서 밤을 보내고 뻔뻔스런 얼굴을 하고 나오는 거, 난 용서하지 못하겠어.

모든 것을 내던진 여자가 할 수 있는 짓이라고 여겨왔어.

지금도 그래. 나라는 여자가 그렇게 내던지지 못한 상태라서

이렇게 속이 상해. 속초에 다녀와서도 그렇게 허무하고,

속상하고, 후회하고, 불안해하고 많이 아파했었어. 다시는....

이라고 맘먹었었어. 뭐야 이게, 몇 번이나 반복되고, 어디까지 갈까 겁나.


모두에게 현역이라고 이 여자의 신분까지 밝혀 놓고, 여자를 원한다고

그 사람에 속해있고, 연결되어 있는 것들 몽땅 짓밟힌 것 같아 기분 나빠.

겨우 그거냐고, 권위 때문이라고, 위선이라고, 엉터리 자존심이라고,

뭐라고 말해도 좋아. 맞는 얘길 거야.

그래도 난 이렇게 속이 상해.

다신 그 동네 고개 들고 못 갈 것 갔고, 그 남자 다시 보고 싶지도 않을 것 같애.

결혼 같은 거 안하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

못하는 거지. 못해도 괜찮아. 못하는 거 억지로 해야 그렇지.

잘하는 거 공부밖엔 없다고 했지. 맞아. 그러면 잘하는 거나 열심히

더 잘하고 살아야지.

버릇처럼 오기처럼 해온 거니까 또 그렇게 해나갈 수 있을 꺼야.

많이 외롭겠지만 괜찮아. 어차피 외롭게 죽을 건 데.

아직 이런 고집 부리고 있어 미안해, 병이야.

영등포 어느 구석에서 알몸을 보인 남자임으로 해서 계속 고만해 왔듯이

몸으로 겪은 남자임으로 해서 내가 떠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렇더라도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만남을 만들려고 하면 난 또 오기가 생길 거야.

그냥 놔둬 줘 ( 이건 부탁하는 거야 )

우린 둘 다 너무 이기적이고, 오기적이어서 결국은 부딪혀 깨져버릴 것 같애

둘 다.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난 전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렇지 못하는 건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걸 거야.

난 자꾸 “죄”라는 생각이 드나 몰라. 이것도 저것도 몽땅.

“벌” 생각도 해. 보속. 그래 받게 될 꺼야. 내가 하느님을 외면하고 있다고 해서 그분도 날 외면하고 계시진 않을 거구.

나의 이모든 어리석음 다 알고 계실 거니깐.

형편없는 애가, 그렇지 않은 것처럼 하고 있고, 그게 자신인 것처럼

살아 왔고, 살고 있으니깐.

사실로 내 목을 조이는 건 A 만 있는 통지표나, 터무니없는 자신감이나

주위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신뢰이거나, 자신을 위해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한 남자 -그런 것들에 용감하게 거슬릴 수 없는 비겁함이지.

주제 파악은 대충 하고 있다고  생각해. 어차피 문젠 자신에게로 봉착되는 거니깐.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교만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몰라. 또 혼란에 빠져.

 사는 것,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전엔 김광수라는 사람 황량한 남자라고 생각했어.

가슴에 바람이 일게 하는.

지금은 거기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까지 덧붙여져.

그만 쓰자. 종일 사천만원 주고 살 수 있는 집 있나 보러 다녔어.

많이 피곤하고 잘 잘 수 있을 것 같애.

건강하게 가을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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