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1213 항공대 위탁교육: 간호사 훈육관
언제고 겨울이 시작되면 이유 없이 불안해 지는 데 금년 겨울도 예외가 아니다. 아마 김장이니 연탄이니, 매일 걱정스럽던 엄마의 모습을 보며 큰 때문이거나 내 또래 다른 녀석들보다 더 춥고 견디기 어려웠던 겨울에의 기억 때문이리라.
어느 땐 이런 불안스러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고 도대체 그 이유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그저 또 겨울을 맞을 때면 습관적으로 불안해 짐을 어쩔 수 없다
컴퓨터에 관한 Report를 끝으로 서울에서의 생활도 매듭을 짓고 지금부터 1월 초순까지 원주에 머물 것 같다. 지금에 와선 그 옛날 설레던 휴가 때의 느낌도 그 빛이 희미해 졌지만
눈이 내리고,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산타크로즈를 닮아 있을 때 누구 옛날의 나처럼 이곳 原州를 바라고 오는 사람 있어 내가 그의 반가운 사람이라면... 하는 자조(自嘲).
어떻게 지냈는지...?
마구 지껄이던 날 보며 웃던, 그런 눈빛으로 사는가?
약해진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자신은 강한 모습이라는 의식이 밴- 차고 자신에 차있고 오만한 눈빛으로 사는가?
침묵은 바보의 마지막 재치라던데... 이런 때, 이런 회색의 저녁에는 되새김질하듯 묵은 기억들을 다시 색칠하고 먼지 털다가 내가 이렇게 바보입네 하고 말지. 그리고 이렇게 자위하는 거야. ‘ 어차피 인간은 자신의 몰골대로 살기 마련이다’
원주 오면 전화해, 아니 좀 해주오. 얼굴도 보고 대구에 안간 거 벌충하고
얼마나 늙었나 확인도 하게.
83.12.13 광수 씀
43-8474
19840116
내려보거나 쳐다보고 있는 자세로는 이제까지 수없이 되풀이 되어온
타성에 쩔은 얘기외에 다른 이야길 할 수 없겠기에 오늘 京을 이제까지의
대(臺) 위에서 내려오게 하다.
물론 그 대(臺) 는 내가 임의로 쌓은 것이고 또 임의로 京을 그 위에 세워 두었었다. 쌓는 동안이나, 그 위에 세워둔 경의 상(像)을 바라보며 읊조리던 기원이나 절망스런 몸짓은 나름대로는 이제까지 충분히 전했다고 생각한다.
혹 그에 대한 京의 태도도 분명하고, 내가 날 생각하듯 확실한 答이 되돌아 왔는 지도 모르겠고... 또 그 분명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면 그건 나의 無知이거나 편견에 의한 수용의 거부였을 것이다.
이제 京을 내리고 그 대(臺)를 허물고 나자 우린 마주 서 있을 지도 모르고,
아니면 이제가지의 위치와 달라진 시각 때문에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하게 남길 수 있는 최소한의 느낌은 京은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원하던 여자였고, 그 기원이 이루어지건 , 그렇지 않건 간에 평생을 가슴에 묻어 놓고 살아야 할 여자라는 것이다.
얘기가 반복되지만
난 京에게 열 중 셋만이라도 내게 취할 게 있다면 그것만 보고 내게 와 달라고 얘기하고 있으며 그 나머지를 京에게서 취하고 싶은 것이다.
1977년 이후의 이제까지 나의 京에 대한 어거지에서 무척 많은 말들을 쓰고 지껄이고 하면서 그게 단순한 과시나 치기뿐이 아니라는 걸 京이 알리라.
그런 여자니까, 얼마나 절실한 몸짓인지 알리라 하는 자위.
아니 이런게 결국, 누적되고 내 빛깔을 칠해 臺가 됐는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새로 쌓게 되는 군-
내가 무지하다는 것, 수용하기를 거부한다는 걸 자인하더라도, 아니 자인하고 나서, 이제 뭔가 京으로부터 듣고 싶은 게 있다.
마주 서서 어떤 여자인가, 자꾸 내가 준비한 의상을 씌우려 하지 않고 그대로를 느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아주 작은 여자, 그냥 웃고만 있는 여자
그래 언제까지 웃고만 있을 것이냐? 언제까지 내게 像으로만 존재할 것이냐?
난 이제 京을 내 앞에 보고 있다. 이젠 웃고 있을 때가 아니다.
뭔가 얘기해 주어야 할 때다.
나를 그 像 앞에서 떠나게 하든가, 내게로 다가와 내 손을 잡아 주던가해야 할 때인 것 같다.
또 치기를 부린다. 그럼 그냥 웃고만 있을 텐데...
3월이면 난 스물 여덟이 되고 8월까지는 京이 스물 아홉이 되지 못한다.
그때까지는 나이 어린 남자라는 얘길 듣지 않아도 될 것이고
“ 결혼해-” 그랬지?
그래 결혼 할거다. 최소한 스물 아홉 된 신부는 얻지 않으려 한다.
치기(稚氣) 다. 왜인가? 왜 그렇고 있는가?
만나면 그런 표정만 짓고, 그런 얘기만 하고.
그러면서 점점 멀리 앉아있게 되고...
아니, 도대체 이 꼴도 안되는 춤을 추는 놈은
어떤 병신이냐!
84. 1.16
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