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0913 항공대 위탁교육: 간호사 훈육관
며칠 째 편질 써야겠다고 벼르다.
제법 서늘해진 날씨고, 매양 어려 보이는 얼굴들이 어느새 취직 걱정들, 기사 시험들... 그래 덩달아 나도 마지막 학기라니까... 하며 어수선해 한다.
그렇게 학기가 시작 됐다. 이런 어수선한 심정도, 어린애들 틈에 끼여 감격해 한다고 말 하지야 마시겠지. 하여간 이야기책의 남자아이처럼 용감하게, 이번 학기엔 뭔가를 해야겠다고 다짐을 해 본다. 영어를 하든 컴퓨터를 하든...
어떻게 살고 계시는가?
어떤 고민을 하며 사는가? 고민을 해야 누가 알게 하지야 않는 타입이니까 알 리도 없겠지만, 엄살 심한 나는 요즈음 또 그런 주기인 것 같다. 내 ‘인간의 값’, ‘무게’, ‘格’, 이런 게 불만인 것이다. 내가 날 봐도 도대체 끌리는 면이 없으니 남들인들 오죽하랴? 도대체 이제까지 바둥거려 뭘 쌓았는가? 이 만큼 나이 먹었으면 이제 뭔가는, 조그만치 내보일 게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앞으로의 세월도 이제까지와 같다면, 오랜 후의 내 모습이 지금 이 보기 싫은 몰골과 얼마나 달라져 있겠는가?
그런 것 말고라도, 경례하고 선배 무섭다는 자랑만 하던 풋내기 사관생도가
-좀 웃기는 표현이지?- 이제 징그러운 대위가 되고 나서도, 그저 그만한 거리에 있는 여자에게 별반 변한 것도 없는 내용의 편지를 쓰고 있다던가, 그러니 그 가슴이라는 게 몇 푼의 깊이를 갖고 있겠는가? 도대체 거기 뭘 품을 수 있겠는가 따위.
왜 이렇게 흔들리느냐? 심지가 왜 이렇게 얕으냐? 왜 연애도 한번 멋있게 못해 보느냐? 도대체 난 어떤 것으로든 특징 지워질 게 있느냐? 그러니 이 놈의 여자가 몃 살이냐 물었겠지.
방학중에 한번 내려가고 싶었으나 우선 자신이 없었고, 그 다음 지금은 말 대가리처럼 깍아 놓은 새카만 내 두상을 보면 그나마 남은 정마저 떨어질 까봐 시월쯤에 내려가 볼까 하고 있다. 모르지 시월엔 청첩장을 보낼 수 있으려는 지도.
그리고 경희 당신.
말 모가지에 끈을 매, 말 코 앞에 늘인 홍당무 같은, 도대체 가까워 질 수 없는, 잠결에 들리는 예배당 종소리 마냥, 부인할 수도, 의식할 수도 없는...
당신은 어떤 의미에서 죄를 짓고 있는지도 모르지.
나?
좀 고지식하고 오기를 부리고 있었겠지. 치기도 좀 있고, 모자라고.
맞아.
행복해 질 수 없을 게야. 서로 찌르기 쉬운 형이니까. 그러나 행복하다는 건뭔가? 잊는다는 건, 언젠가 옆 좌석에 탔던 아가씨를 잊듯 아주 완전하게 기억에서 삭제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내가 경희에 대한 입장에서, 가능한 것이냐? 아니다, 오해의 선 안에 들어서 버렸다. 그 거리에 두고 그 대상 말고 선망하던 내 자신을 잊을 수 있겠는가? 하는 편이 더 낫겠다. 당신은 시간표를 매단 내 앞의 벽이니까
하늘이 우르릉거린다. 한바탕 쏟아지려나, 번쩍번쩍하니
83. 9.1 광수
19830916 대위 항공대학: 청평병원
경쾌하게 써 보내자. 추석 맞으러 원주 오면 한번 만나자. 오후 다섯 시쯤
‘카페 프라자’인가에서... 이런 글을 쓰면서 뭘 느끼냐구? 다방 문 옆에 있는
메모판에 솜씨 껏 접은 메모지를 꽂아 둔다. “민영아 내일 오후 다섯시에 여기서 만나자 -광수-” 그러고 다방을 나설 때의 느낌이다. 자신있게 써 놓긴 했지만 민영이란 인물은 그냥 만들어낸 여자니까 -혹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야 있을 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걸 읽을 리는 물론 없는 거고, 그저 자신을 기만하기 위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서고 혹 내일 다시 내가 그곳에 간다해도, 그리고 아무리 그 메모판을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한다해도 틀림없이 내가 꽂아놓은 그대로메모지 남아있을 거라는...
그런 느낌.
83. 구월 열 닷새 날 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