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는 29세에 결혼했는데(1986년) 우리 세대로선 제법 늦은 결혼이었다.
결혼 전에 못된 선배들에게서, 신혼 초에 와이프 군기 잡는 법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렇게만 하면 평생 아내에게 호통치며 사는 줄 알았다.
그래서 별 것 아닌 일에도 발끈 화를 내곤, 내랑 똑 같은 시간에 출근해야 하는 아내가
새벽 일찍 일어나 정성스레 차려놓은 밥상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거만한 표정으로 휭하니 집을 나서곤 했다.
그럼 오래지 않아 아내에게서 '어젠 미안했어~~'하는 항복의 전화가 오곤했던 것이다.
피차, 뭘 믿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뻐기고, 공손했는지 모르겠다.
둘이 중학교 동기동창에 한 반이었는데~ 게다가 공부로 치면 아내가 훨씬 더 잘했는데.
2.
그렇게 신혼의 1년이 지나갈 무렵.
주말을 맞아 고무장갑을 끼고 화장실 청소를 하던 아내가 말했다.
' 아! 난 누가 이 머리카락 뭉치 좀 치워줬으면 좋겠다~'
순간, 아이고야~
둘이 살며 그 '누가'가 누구냐?
그러고 보니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머리카락 뭉치를 내가 치워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게 눈에 들어올질 않았다.
그냥, 저절로 없어지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 날 이후로 화장실이건 샤워장이건 머리카락 뭉치가 생기면 얼른 휴지로 감싸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린다.
바라건데, 그 날 이후로 아내가 단 한 번도 머리카락 뭉치를 버린 적이 없기를~~
3.
첫째는 고양이를, 둘째는 강아지를 좋아해 어느 때는 사람 넷에 짐승 두 마리가
한 공간에서 복작대며, 머리카락이며 털을 흩날리던 때가 있었다.
진공청소기 필터도 수시로 막히고, 화장실 하수도에도 수시로 인수합작 머리카락 덩어리가
생성되는 것이었다.
이 무렵부터는 그 덩어리 청소 책임을 두 녀석에게 전가하고, 슬그머니 손을 떼려했으나
이 녀석들이 신혼 초의 내꼴이라, 그 덩어리가 인지되지 않는 눈치다.
잔소리하다가 지쳐 내 손으로 치우고 사는지 오래되었다.
4.
퇴직 후, 버켓 리스트 중 상위에 있는 '머리 길러보기'에 도전했다.
사람이 간사한 동물이라, 현직에 있을 땐 옆머리가 귀를 살짝 덥기만해도 견딜 수가 없어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이발소 갈 구실만 찾곤했는데~
일단 '길러보자' 맘을 먹으니, 머리가 빨리 자라 뒤에서 묶을 수 있게 되기까지
기다릴 수가 없는 것이다.
드디어 머리 꽁지를 묶을 수 있게 되었다.
헌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머리 감기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샴프도 많이 쓰게 된다. 세면기에 차고 넘치는 거품을 보면서 낚시꾼으로서의 양심이
마구 흔들리는 것이었다.
머리감기가 번거로우니, 모자를 쓰고 외출하거나, 아니면 아예 집에 들어앉게 된 것이다.
들어 앉아 있을거면 머린 길러 뭐하나? 남자고 여자고 누가 봐주기를 기대하며
머리 기르고, 빗고, 말고 하는 거 아니겠는가?
허리춤까지 머리를 늘어뜨리고 다니는게 요즘 처자들의 기본 헤어스타일이 됐지만
난 안다.
머리를 저렇게 늘어뜨리고 나오기까지 얼마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하는지~
또 얼마나 많이 환경을 훼손하고, 에너지를 소모하는지~
그리고
그 집 화장실, 방, 방 곳곳에 얼마나 많은 긴 머리카락들이 흩어져 있을지를~
그렇다고 어쩌랴?
그게 일상인걸, 그 일상의 위력이 얼마나 막강한 사회적 강요인지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5.
50년 전만해도 우리 어머니는 길 가 들마루에 앉아 젓가슴을 드러내고
동생에게 젖을 먹이곤 하셨는데~ 요즘 그러면 검색어 1위에 오르실걸.
시대를 바꿔서, 요즘 입는 스키니 진이나 핫팬츠를 그 때 입고 나왔다면
'화냥년' 소리는 따논 당상이었을 게다.
세월이 머리카락 뭉치만큼이나 머리 속을 을 복잡하게 엮어 놓는다.
정신 차리자. 뭔소리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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