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사람이야기

異所

언덕위에 서서 2006. 12. 16. 14:32
1.
중3인 둘째의 마지막 기말시험이란다.
어제 사은회가 늦게 끝나 퇴근 못한 엄마 대신, 큰놈이 아침을 차려준다.
시험 때면 엄마가 특별 서비스로 챙겨주던 코코아까지~~~

늦게 일어나 꾸역꾸역 한 그릇 다 비우고난 둘째 놈,
코코아병을 신발주머니에 넣으며, 변성기가 한창인 목소리로 한마디 한다.
“ 형! 잘 먹었어~~~”

이미 대전외고에 합격한 터라, 기말고사가 별 의미는 없지만,
다른 아이들 막판 피치 올리고 있는 시기에, 저 혼자 긴장 풀려 나른해질까봐,
아빠가 있는 대로 꾀고 압을 주고 했는데~~ 결과가 어떻게 나오려나 모르겠다.

그나저나, 외고라는 곳이 만만치가 않던데, 걱정이다.
합격자 예비 소집하던 날. 바로 과제가 부여 되는데~~~
1월초와 2월초에 과별로 4~5일씩 외국어 소개교육을 실시할 예정이고,
그때 제출할 숙제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 숙제 때문에 사야할 책값이 10만원에 가까웠다.
( 그 책 다 읽고 숙제하려면 게임하겠단 소리 안나올 게다)

졸업시즌, 느슨해지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입학과 동시에 몰아세우려는
전략인 듯했다.
(애들이야 힘들겠지만 부모입장에서야 그보다 고마울 데가 어디 있나?)

2.
그런데 둘째 짐 싸서 내려가면, 혼자 남는 큰놈은 어떡하나?

컴퓨터 가지고 둘이 싸우지 않고, 게임이야 원없이 하겠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엄마, 아빠 출근하고 나서 혼자 긴긴 해를
어떻게 보낼지~~~~ 걱정이다.
10여년을 옆에 붙어 있으면서, 지지고 볶고하던 존재가 일순간에 없어지는데.

이런, 저런 걱정을 하던 차에,
큰놈이 제 사촌이 키우던 고양이를 얻어왔다.

지난 번 교통사고로 개 잃어버린 충격이 너무 커, 다시 짐승 키운다는 게
쉽지 않을 줄은 알지만, 동생 빈자리 대신하는 의미로 흔쾌이 키우라 했다.

고양이 품종이 Russian Blue 라고 이름이 그럴싸하다.
아니 이름만 그럴싸하다. 이름에서 우울한 러시아 시인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실상은 쥐색 털에, 눈동자가 초록색인 평범한 고양이다.

벽모의 묘 [碧毛의 猫]란 시 제목 들어보셨을 것이다.
푸른 털의 고양이”란 뜻이란다. 아마 이 Russian Blue 종을 염두에 둔 묘사인 듯하다.

3,
고양이는 행동거지가 개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첫날부터 똥, 오줌 다 가리고, 사람한테 개기지 않고 조용해서
" 그 놈 참 기특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개처럼, 부를 때 마다 꼬리치며 달려와 안기고 하지는 않지만,
눈치 봐가며 살그머니 무릎 위에 올라와 동그마니 앉아있는 모습이며,
조용히 다가와 사람 몸에 제 몸을 비벼대는 짓거리가 나름대로 지 귀염은 떤다.
( 이장희의 시,"봄은 고양이로소이다"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게 내숭이었다. 이 놈이 일을 벌리기 시작하는데, 개는 발 벗고 따라가도 안 된다.

우선 이 놈은 집안 구석구석 못가는 곳이 없다.
먼지 구덩이라면 침대 밑, 베란다 창고 구석, 화장실 변기 뒤, 세탁기 뒤편,
심지어, 베란다 창문과 방충망 사이의 3~4cm되는 공간까지 빠짐없이 섭렵한 뒤,
식탁위로 뛰어 오르거나, 애들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의이구~~ 이 웬수."

일단 애들 교육부터 시킨다.
“ 침대 속에 절대로 고양이 데리고 들어가지 말 것”,
“잘 때 절대로 방문 열어 놓지 말 것”,
“고양이 목욕 자주 시킬 것”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고양이 안고 뒹구는 애들을 보면서,
“ 아뿔싸, 애하나 더 늘었구나.~” 뒤 늦은 깨달음에 혀를 찬다.

4.
그래, 개 키울 땐 똥, 오줌 다 치웠지 않은가.
고양이 핑계 대고, 변기 뒤며, 베란다 창고구석이며, 세탁기 뒤며,
10년 주기 대청소 한번 하지 뭐~~~

헌데 이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청소기 끝이 뱀 대가리도 아니고,
그 틈새를 어떻게 파고 들어가는가 말이다. 이걸 어쩐다?

애들한텐 미안하지만, 고양이를 아령에 묶어 보았다.

한 20여분 난리를 치더니 곧 얌전 해진다. 그래, 이런 방법이 있었군.
1~2개월 지나, 지도 철나면, 지금처럼 천방지축 후비고 나대지 않겠지.
그 때 풀어 주리라 맘을 먹는다.

5.
혼자 남게 될 큰놈한테도 위안이 될 것이고,
둘째놈도 고양이 품고, 내려놓을 줄 모르는 폼새로 보아
틈나는 대로 집에 올라 올라올 것 아닌가?
에미, 애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고양이 보고 싶어서라도~~

그래, 그 기대로 고양이 수발 들어주기로 하자.
그러다 보면
어른들도 고양이한테 정 붙이게 될 터이니~~~~~~~~~~~~


* 異所: 둥지를 떠남, 새, 짐승의 새끼들이 자라, 둥지를 떠나는 것, 인간도 짐승의
한 種이니, 대가리 굵으면 부모곁 떠나게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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