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가을인가?
웃통 벗고, 팬티바람으로 TV앞에 앉아 있다, 팔뚝에 돋는 소름 때문에 런닝셔츠 챙겨 입을 때,
머리 감다, 하얀 세면대위에 까맣게 떠 있는 머리카락이 문득 생생하게 눈에 띌 때,
멍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다, 갑자기 불안해지며,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날 때.
- 그래서 미루던 일거리 찾아내 다시 살펴보고, 헬스장 등록하고, 등산백 꺼내 내용물 살펴보고,
한 낮에 자전거 끌고나가 땀 좀 흘리고, 미뤄두었던 몇몇에게 안부전화하고, 갑자기 부산스러워 진다.-
이 때가 가을 초들녘일게다.
더위 끝나면 곧이어 혹한과 배고픔 온다는 태고의 경험이, 이제까지 우리 유전자를 통해
전해오기 때문인가?
아님, 각자가 겪은, 춥고 불편하고 성가셨던 겨울의 기억이 누적되어서 인가?
한 자락 서늘한 가을기운에도 지레 긴장하게 된다.
가을엔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생명체가 다 바빠지는 것 같다.
들판의 각종 곡식들, 곤충 , 동식물들 모두 제 나름의 방식으로 마무리하고 갈무리하는 시기.
풍요의 계절. 가을.
가을을 풍요의 계절이라 하고, 거기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꼭 그런 것인가?
혹 이 가을은, 겉으론 환하게 웃지만, 뒤로 감춘 손에는 경종을 들고 있는 겨울의 전령사가 아닐까?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닥쳐올 혹한에 큰 고통이 따른다는 경고의 의미로서, 사람들의 표현과는 달리,
늘어진 마음을 다잡아 뭔가를 분주히 준비해야만 하는, 조바심 나는 날들이 아닐까?
당장 피부가 수축되고, 정리할 머리카락 빨리 털어내는 우리 몸의 변화를 봐도, 가을은 긴장과 조바심의
계절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하여간 다행이다.
누가 어떻게 가을을 정의하건, 어떤 원인에 의하건,
가을은 뉘게고 뭔가 생각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준비하게 하는 시기인 것 같다.
그 시기가 8월이건, 11월이건~
어디 한 여름 찌는 더위 속에서야, 생각이나마 제대로 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의욕자체가 생겨나지 않으니
(혹 그래서 추운지방엔 장편소설이, 더운 지방엔 단편이 많은 것 아닐까?)
그것이 또 自然의 燮理 이리라.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왜 사는가?” 로부터 시작하여, 걸어 온 길 되돌아보고, 걸어갈 길 내다보고
궁리할 수 있는 계절. 그러라고 마련해주신 계절.
가을이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