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산이야기

백두산 유람기

언덕위에 서서 2005. 8. 15. 18:45
1일차

8월 9일 05시 30분
택시회사에 아파트 동호수를 불러주고, 핸펀를 끈다.

자! 이제부터 5일간 저 핸펀과 떨어져 살 수 있게 되었다.
사무실 책상위에 여행사 전화번호를 남겨 두었으니
3차대전이나 그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 연락하겠지~

태백가든 앞으로 간다.
인천공항까지 실어다 줄 버스, 함께 여행할 처형내외를 만난다.

언제 나도 여행가방을 끌고 여기 와 보나 했는데~~
버스에 오른다. 흐린 하늘이 오히려 마음을 푸근하게 해준다.

아들 두 놈을 포함, 4식구의 5일간 여행 짐을 꾸리느라
새벽 1시에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좀체 눈을 붙이기 어렵다.

그 새 버스밖에는 참았던 빗줄기가 쏟아진다.
" 그래, 내 없는 새 헬기 뜰 일 없도록 계속 내려라~~ "
홀가분하지만 온전히 털어지지는 않는다. 곧 이곳으로 돌아올 테니~~
이런 게 여행의 맛인가 보다.


공항에서
함께 여행할 8쌍의 나이 지긋하신 일행이 합류하고
짐 검사하다 약품주머니에 들어있는 가위 때문에 한바탕 짐 뒤집고~

11시30분. 드디어 비행기에 오른다.
중국남방항공 소속 에어버스다. 200명쯤 타려나~~~?
한 시간 쯤 비행하여 중국 대련(大連 Dalian) 공항에 내려준다.
시차 때문에 중국은 아직 12시란다.


호텔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는다.
마파두부가 맛있어 보여 한 숫갈 입에 넣으니~~
왓~~~따. 이건 아니다. 난생 첨 먹어보는 맛이다.
화학약품 입에 넣은 것 같다.
생긴 건 한국의 마파두부와 거의 같은데
이렇게 다를 수가~~?

나뿐이 아니다. 다들 이 음식에 당하고 저 접시에 놀라고~~
재미있다~~~ (한국 갈 때까지 마파두부 절대 먹지 말아야지)

하하 낄낄, 투덜 중얼, 점심을 마치고 나자
조선족 현지가이드가 말한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감옥으로 모시겠습니다."
뭐! 감옥으로? 중국 오자마자 감옥부터 가냐?

여순(旅順 Loshunkou)은 대련으로부터 버스로 1시간 거리고
여순 감옥은 1909년 10월 안중근 義士가 5개월여 구금되었다
사형당한 곳이란다. 당시 義士의 나이는 32세.

감옥 구경은 난생 처음인데 3평정도 될까한 방에 8명을 수용했단다.
그런데 의사는 특별대우(?)를 받아
당직 간수 방 바로 옆의 4~5평은 되어 보이는 독방에
책상과 의자 필기도구, 서적 등을 제공 받으며 수감되었더란다.
잡범들과 틀리는 중대사범이라, 교화(?)하려했다나~~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의 풍물거리 비슷한 “러시아거리”를 들렀다.
대련이라는 곳이 처음에 러시아 지배를 받다가 다시 일본의 지배를
받은 곳이라는데
그래서인지 양국의 서로 다른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 곳곳에
경쟁하듯 버티고 있었다.
가이드의 입을 빌면 중국의 반일본정서도 한국 못지않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에 돌아다니는 차량의 50~60%가 일제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지~~? 여행 내내 씁쓰름한 화두였다.
하기야 내 품에도 일제 디카가 파고 들어와 있지 않은가.




다음날 (2일차).

연길로 출발이다. 공항에 내리니 또 다른 현지 가이드가 대기하고 있다.
백두산까지는 260km로 버스로 5시간을 간단다.
창밖 풍경이 유순한 산세와 이를 개간한 농경지, 짙은 녹색과 대비되어
평안하기 그지없는 빨간 기와지붕 마을들로 이어진다.

지붕 처마 끝이 들리고 앞면에 흰색 칠을 했으면 조선족집이고,
공장건물처럼 건물 옆면이 딱 잘라진 집(맞배지붕이라 한단다)은
漢族(중국인)이 사는 집이란다.
벼가 패기 시작하는 논도 많고, 옥수수도 밭도 많다.

멀리서 보기엔 이쁘고 여유롭던 마을집들이 자세히 보니
낡고, 좁고, 낮았고 해진 뒤엔 백열등 불빛아래 칙칙하다.
질척한 안마당엔 닭이며 오리, 거위를 놓아먹인다.
우리의 70년대 풍경이다.

드디어 백두산이 속해있는 안도현에 도착했다.
호텔에 들기 전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단다.
이제까지 와는 많이 다른 식당풍경이다.

20평정도 되어 보이는 시골식당인데 백열등 2~3개가
조명의 전부다.
어떤 테이블은 음식을 살펴보며 먹을 수 있으나 어떤 곳은
컴컴한 데서 그저 짐작으로 음식을 집어온다.
한꺼번에 밀어닥친 한국 손님들 시중드느라 후덥지근한 날씨에
땀이 맺힌 조선족 아이들의 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하다.
15~6세나 되었을까?
목이(木耳) 버섯을 맛있게 먹고, 천원권 몇 장을
테이블위에 놓고 나온다.
그걸 잽싸게 낚아채 주머니에 집어 넣는 여자애의 모습을 보며
가슴속에서 뭔가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아~~ 그냥 나올껄.





3일차

백두산 아래 첫 동네 二道白河진(津)이라는 곳에서 1박 후
일찍 짐을 꾸려 버스에 오른다.
천지를 볼 수 있을지 가슴 졸이며~~
백두산은 하루에도 기상이 102번씩 바뀐다는
가이드의 말에 기대 반 걱정 반인 심정으로.

드디어 백두산 밑 주차장에 도착했다.
온통 돗데기시장인데, 80~90% 정도는 한국사람인 것 같다.
이곳에서 2갈래 길이 있는데, 한 길은 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정상(천문봉 2654m)으로 찝차를 타고 오르는 길이고(20분 내외),
다른 한길은 천지의 가장자리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길(왕복 3시간)이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정상은 안개에 막혔고, 먼저 천지의 水面을
보러 도보로 이동한다.
20여분 걷다보니 장백폭포가 웅장한 자태를 보인다. 증명사진 박고
그 우측으로 난 가파른 시멘트 계단을 오른다.
급경사지에 건설된 피암동굴 속으로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계단이 1000개도 넘는단다. 여기선 비를 안 맞아도 되었다.

숨이 막힌다. 아마 고소증도 조금 동반되는 모양이다.
계단을 다 오르자 장백폭포로 떨어지기 전, 천지물이 잔잔한
시내가 되어 흐른다.
이곳도 비와 안개에 덥혀 앞이 5m 정도 밖에 보이지 않는다.

천지의 水面마저 못보고 가나보다 하고 있는 데 순식간에
안개가 걷히며 천지를, 그것도 반 정도만을 보여준다.
온통 환호성이다. 저 물- “백두산에 바다가 있네요?”하던 아들놈의 표현처럼-
을 보러 이 많은 사람들이 이곳까지 온 것 아닌가?
그러니 모든 사람의 입에서 탄성이 나오는 건 당연하지~~

올라간 길을 되짚어 내려와 찝차로 정상에 올랐으나
차가운 정상의 안개와 바람뿐~.
다음에 한번 더 오라는 뜻인가 보다하고 내려왔다.
그렇게 아쉽게 백두산 관광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북한에서 운영하는 “묘향산전시관”에 들러
조악한 북한산 상품선전인지, 체제선전인지 헷갈리는
판매담당자의 우렁찬 웅변도 듣고, 길림성 국영사슴농장에 들러
녹용도 산후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들어 젖은 옷을 세탁소에 맡기려 하니,
한벌에 중국돈 15원, 속옷7원, 양말 5원(환율 1:140원),
거기에 급행료(Express) 50% 추가란다.
4식구 옷 맡기니 우리 돈으로 3만 여원이다. 봉 뺀다. 뽕빼~~

이곳에선 카드를 사용하기가 힘들고, 애써 바꾼 딸라는 한국 돈과
같은 가치로 치니 1달러 쓸 때마다 400원씩 손해 보는 것이다.
더구나 이곳 사람들이 천원의 가치가 크게 쳐주자 그게 어느새
우리에게도 옮아와서 만원이 무지하게 큰 돈이 되었다.

어쩔 것이냐? 아직도 여정이 2일이나 남아 있는 데~~
백 속에서 젖은 옷을 썩힐 수는 없는 일이고, 세탁을 맡겼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세탁물을 가져왔는데 반도 마르질 않았다.
4성(무궁화)급 호텔이라는데~~~ 아마 건조기는 없는 듯하고
그나마 반쯤 마른 것도, 다리미로 다린 것 같았다.
후~~ 냄새 날 텐데~~~~



다음 날 (4일차).

점점 무거워지는 짐들을 꾸려 (연길산 검정깨와 북한산 잣, 피나무꿀 등)
버스에 싣고~~
오늘은 일송정, 윤동주 시인의 모교인 용정중학교가 있는 龍井과
북한 땅이 50m 건너편에 보이는 두만강변 도문(圖們)을 관광한단다.

용정중학교에선 한때 학교가 폐교될 뻔했었다는 일행의 설명에
거금 20불을 기부하고, 길림성에서 출판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
도 한권 샀다. 훌륭한 선배 덕을 후배들이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도문에서 본 두만강은 흙탕물에 폭은 50m내외, 깊이는 1m 내외라니
사실 강이라 하기도 좀 그렇다.
이 강에서 뗏목 배를 타고 저편 강기슭에도 가보고,
우리 큰놈보다 약해 보이는 북한군 초병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자리에선 여행객으로서 마냥 들뜬 기분이 될 수는 없다.

더구나 관광버스의 문간에서 옥수수며, 천도복숭아 등을 들고
조선족 노인네가 파는 것이니 꼭 사라며 소매를 붙잡는, 닳고 영민해진
안노인네들에 둘러싸이면, 정말이지 그런 기분이 될 수 없다.

동포라는 게 뭔지, 조선족, 남한과 북한은 또 어떻게 구분되는 건지
윤동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떠받들면서, 조선족 여인네들이
한국에 나가 막일하다 불법취업자로 추방되는 건
또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 건지?
저 건너 앳된 북한군 병사는 敵인지 아님 우리 큰 아들 놈의 또래 친구인지?

순간, 어지러워 졌다.
첨엔 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출발해서
그렇게 기대하던 백두산에도 오르고, 무질서한 거리 풍경과 중국인의
생활을 보며 자긍심도 느끼며 일정을 즐기고 있었는데,
여기 두만강변의 한 小邑에 와서 예기치 못한 이런 혼란에 빠지다니~~~
나뿐만 아니고 일행이 모두 이런 감회에 젖는 듯했다.

심양((審陽)으로 이동하기 위해 연길공항으로 이동한다.
심양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 거리로 김포에서 제주까지와 비슷 할게다.

저녁 9시 45분에 이륙하여 10시 45분에 심양에 도착해야 할 비행기가
밤 12시에 연길 공항에 되돌아와 승객을 내려놓는다.
심양공항의 기상악화 때문이란다. 30분 후 다시 타란다.
2번째도 되돌아왔다. 호텔 정해 줄테니 내리란다.

기내에 있던 한국 가이드들이 순간적으로 한곳에 모여 대책을
협의하더니 돌아와 얘기한다. 기내에서 대기하자고,
심양 행 비행기가 모두 회항해 연길시내에 호텔이 없단다.
민박도 없단다. 지금내리면 공항청사 바닥에서 대기해야 한다고~~
승객이 안 내리고 있어야 비행기 빨리 뜬다고,
일단 내리면 이 뙤놈들하고는 말도 못 붙힌다고~~~


결국 03:10분에 3번째 이륙하여 심양공항 상공에서 30여분을
Holding하다 04:40분에 심양에 내려준다.

정리해 보면 1회 항공료내고 5배나 긴 비행을 한 셈이다.
그것도 밤새도록 우당탕거리는 중국의 하늘에서~~
항공기가 착륙하고 나자, 밤새 가슴을 졸이던 승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한국에서 김포-제주도를 밤새 왔다갔다했다면, 아마 그 항공사
문 닫아야 했을 텐데~~
중국 항공사도 대단하고, 박수로 승무원들의 고생을 위로한
한국승객들도 대단했다.
그 기간에 JAL을 비롯한 2건의 여객기 사고가 있었던데
그 뉴스를 보니 무사히 착륙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고
대단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륙하고 얼마 안돼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걸 보며
8월엔 중국에 오지 말아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현지 가이드 말이 6월중순이나 9월중순에 와야 천지를 볼 확률이 높단다)




5일차

남은 압록강 일정을 취소하고 호텔에서 서너 시간 눈을 붙였다.
잠시 심양시내를 돌아보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금방 인천공항이다. 데리러 온 여행사 버스에 몸을 실으니
연휴 첫날이라 고속도로가 붐빈다. 그래도 좋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깔끔한 도로위에 선명하게 그어진 차선.
그 안에서 줄맞춰 운행하는 자동차, 차선 바꿀 때마다 깜빡이를 켠다.
그 지겨운 자동차 경적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5일 전엔 몰랐는데, 도로주변도 잘 정리되어있고 밝고
깨끗한 우리나라다. 정말이지 우리나라 선진국이다.
땅덩어리가 좁아 전국적 대청소나 재건축 또는 교통질서
지키기 운동도 쉬울 것 같다.

중국? 덩어리가 커서 좀 어려울 걸~~~?

집에 도착하여 짐을 푸니, 빨래가 세탁기 4회분이다.
자~~ 이젠 핸펀을 켜야지. 내일은 사무실에 나가야 하고

그렇지만 한동안은
당나귀, 삼륜차, 아우디와 미쓰비시가 한덩어리로 움직이는 거리풍경과
백두산, 그 서늘했던 비바람, 안개와 시퍼런 물색
한국말 쓰는 중국인, 조선족, 그리고 북한 병사, 윤동주의 시(詩)
심양의 번개 치던 밤하늘, 승무원들이 다 피해버린 항공기 안
착륙하고나자 누군가의 “이거 박수쳐야하는 거 아니가?”하는 한마디에
일제히 울려퍼진 박수소리~~
이런 것들이 머릿속을 맴돌 것 같다.


PS

큰일이다. 다시 중국에 가고 싶어질 것 같아서~~
그 땐 백두산으로 바로가서 며칠이고 기다려 천지를 보고와야지
Tracking 코스도 많다던데~~
그땐 유람기가 아니라 산행후기가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