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사람이야기

흑빛 공부방

언덕위에 서서 2005. 3. 22. 14:40
장인어른

전북 남원분이신데 한국전 참전용사이다. 한국전 때 평양에 입성,
당시 평양통신학교 재학생이던 꽃다운 장모님을 보고 한눈에 반해,
부대가 철수할 때 함께 모시고와 전쟁 중에 결혼을 하셨다.

4녀2남을 두었는데 5째인 장남은 천주교 신부가 되었다.
장남이 신학교에 가겠다고 했을 때(20년쯤 전) 당신은 성당에
안나가는 유일한 식구였음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신학교행을 허락했고,
그 아들이 신부서품 받는 날, 아들신부에게 영세를 받았다.

신부가 된 아들이 5년여의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태백 고한성당으로
부임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리자
“애비가 못나서~~” (아들을 그 시골, 시커먼 동네 성당에 가 고생
시킨다는 의미였는지?)라고 말씀하셨더란다.
다 큰 자식들이라 그 말씀에 모두 크게 웃었다. 감사한 마음 뒤섞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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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

그 집 2째 딸인데~~(그니까 난 둘째 사위다) 요즘 춘천-제천 간을
출퇴근하느라 하루에 차안에서 3시간을 보낸다.
다음달이라야 차산지 만3년이 되는데, 이미 주행거리가 16만 키로를
넘었다. 그래서 토, 일요일이면 차 옆에 잘 안 간다.

그렇게 긴 한주일이 끝나는 금요일 저녁, 내일(3. 19, 토) 원주에 계신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고한엘 갔다 오겠다고 했다.
고한에 있는 큰처남(신부)과 긴 통화 후에~~

그 신부가 몇 년을 이곳저곳에 부탁하고 협조를 구해 성당 부근에
공부방을 짓기로 했는데 내일 기공식을 한단다.
두 어른이 그 행사에 가시고 싶은데 두 분 다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시니, 옆에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아들은 행사 주관해야하는 입장이라 신경 쓸 겨를이 없고~~

토요일마저 엄마가 없으면 애들도 우울해지고 솔직히 나도 좀
불편하다. (돈 벌어오는 거 감안하더라도~~)
공부방 다 짓고 나서 두 분 모시고 조용히 갔다와도 되겠구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쩌랴, 상황이 그런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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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고한

연탄이 우리의 주 난방연료이던 시절, 태백 고한이 동네가 좀
시커머서 그렇지 경기 좋던 곳이다. 개들도 만원짜리만 물고
돌아다닌다는 곳이었다.
그러던 동네가 기름보일러의 출현과 더불어 피폐할대로 피폐해
지더니, 석탄산업합리환가 뭔가로 생겨난 강원랜드 카지노 때문에 크게
변화하고 있다. (어떤 면에선 더 나쁜 방향으로~~)

요즘은 그 동네 초입부터 도심재개발 물결을 타고 벌어지는 도로공사와
쑥쑥 올라가는 빌딩공사, 카지노덕에 생겨난 전당포 등으로 인해
온 동네가 공사장화되어 어수선하기 그지없고 간혹 한쪽구석으로
따개비 같은 옛날 광부들의 판자촌이 삐죽히 나와있는~~
한마디로 변화란 어떤 것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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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빛 공부방, 기공식

동네가 그렇다보니 청소년을 위한 문화공간이란 말도 안되는 게
이즈음 그곳의 현실이다.
3-4년전까지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조그만 공부방이 있어,
성당 나오는 녀석이건 아니건 다같이 모여서 공부도하고 놀기도하며
청소년들의 모임터 역할을 해왔는데, 그 이름이 "흑빛공부방"이었단다.

이게, 도로공사가 진행되며 세들어 있던 건물이 헐려버린 것이다.
그 후, 그런 모임터 역할을 성당이 대신해오던터에. 그 동네 신부를
비롯한 뜻있는 분들의 협조와 노력( 대 정부기관 투쟁 내지 어거지
떼쓰기 포함)으로 공부방이 아닌 말쑥한 건물이 하나 생겨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지하1층, 지상 3층, 총 건평 270평, 모금액 24억 규모이니 이건 분명히
공부방 수준을 넘어서 그 동네 청소년문화센터 역할을 해낼 것
같더라는 것이다.

기공식이니 터밖에 없는 곳에서 뭘하나 생각하며 어른들을 모시고 가니
의자 1000개를 정리해 놨더란다. 인근의 똥깨나 뀐다는 사람은 다 온 것
같았는데 행사의 백미는 그 동네 중고생들로 이루어진 록 그룹
“하야로비”의 공연이었단다.
건물이 완성되면 다시 그 지하에 둥지를 틀게 될,
전국 청소년 그룹경연대회 1위 입상 3년째인 ~~

그리고 그 흑빛공부방 출신 선배들이 내려왔더란다.
서강대, 연대, 또 뭐 어디로 진학한 선배들이~~~

그 동네 주민들 카지노에 가서 돈 날리고 가정 파탄나고 앞산에 가서
목매는 일 많다.
목까지 안매더라도 한번이라도 게임장 더 들어가려고
주소 옮기는 사람도 적잖다.
(인근 주민들은 카지노 출입횟수가 정해져 있음)
게다가 동네간판 중 절반이 전당포 간판인 것 같던데~~

그런 동네에서 매달 음악회 열고, 영화상영하고 시 낭송회하더니
그런 아이들 키워냈나 보다.
몇몇은 그 방에서 아예 숙식을 하는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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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이었는데
거동불편하신 부모님 제대로 모시지 못할까봐 오지 마시라던 아들과
그럴까봐 안가시겠다던 부모님과
준공식까지 생존해계실지 어쩔지 모른다고 운전해 가서 상상 이상의 행사에
감동 받은 마누라(누나)와~~~

하여간 두 분 대단히 흡족해 하셨을 것 같다.
아들네 성당 행사에 주교님까지 오셨으니 성당가시는 게 본업이 되신
두 분이 얼마나 뿌듯했을까.

장인어른, 혹 거기서 또 “애비가 못나서~~” 안하셨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