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사람이야기

개(犬)가 개가 아니더군요.

언덕위에 서서 2005. 3. 9. 13:54

2년 전 작은놈이 개를 사자고 조르길래
아파트에서 개 키울 생각에 아찔해서,
거의 지킬 수 없는 갖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이번학기에 1등할 것, 개가 오면 씻기고 먹이고
싼 것 치우는 일 등 개에 관한 일체를 스스로 할 것,
개한테 들어가는 비용만큼,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열심히 할 것,
게임시간도 줄일 것~~~~

예상했던 대로 작은놈은 모든 조건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학기말에 1등 성적표를 내밀었다.

아차! 그때서야 살펴보니 가장 가혹한 조건이라고 내밀었던
그 모든 규칙이, 성적표 말고는 모두 사후조건,
개를 산 다음에 논의될 사항이었다.


규칙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차후의 문제고
성적표 한 장에 아무소리 못하고 개를 사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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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나우저 수컷을 한 마리 샀다.
지를 데려오기 전에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아는 듯
거의 짖지를 않고, 실내에선 용변을 보지 않았다.
주는 음식이외에는 지맘대로 먹는 법이 없다.

덕분에 이웃들에게도 “이집 개 같으면 누가 개 키우는 거
반대하겠느냐“는 얘길 들으며 지냈다.

실내에서 용변을 못 보니 아침, 저녁 산책이 필수인데
둘 중에 누군가는 개를 데리고 나가야했다. (얼마나 고소한가)

큰놈이 맘이 좋아
“나는 개가 싫어, 고양이가 좋아”라고 불평을 하면서도
교대로 개시중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얼굴이 얼어붙는 한겨울이건, 장대비 쏟아지는 한여름이건
아침 일찍, 또는 저녁 늦게 개와 함께 20~30분을 밖에 나와
있어야한다는 건 애, 어른을 막론하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용변치울 채비를 들고서 어디서 일을 보나 주목해야하니~~

그렇게 2년여,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만들며 함께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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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저녁~~
작은놈은 학원에서 아직 안돌아오고 큰놈이
개와 산책을 나갔다.

평소보다 좀 늦는다싶은 생각이 들 무렵
" 아빠! 큰일났어요, 좀 나와보세요~~"

현관에서 큰놈의 황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뭔가 평상시와는 다른 느낌에 뛰쳐나가보니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개를 안고 서있다.

강변의 산책로로 가려면
4차선도로를 가로질러야하는데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끈을 매지 않고 오다
개가 차에 치인 것이다.

상황을 보니 개도 개지만 아이가 더 큰 문제다.

끈을 매지 않아서 사고가 났다는 사실에 대한 자기비난,
개에 대한 애정, 자동차에 받쳐 저 만큼 풀썩
나가떨어지는 개를 목격한 충격,
그 개를 안고 집까지 돌아오면서(그 긴~긴 거리를...)
느꼈을 절망감~

그런 것들이 그 얼굴에 다 배어있었다.

개가 문제가 아니라 애가 문제였다.

물론 나도 축 늘어진 채, 아이품에 안겨있는
개의 모습에 당황스러웠지만
얼른 개를 받아들고, 아이를 안심시켰다.

“ 태영아 괜찮아, 얼른 잠바 벗고 물 좀마셔~~
아빠가 슈슈(개이름) 살펴볼게~~”

얼마쯤 지나 아이가 진정이 될 무렵, 나도 마음의
정리가 됐다.
개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판단됐고, 문제는 곧 돌아올
작은아이와 집사람을 포함한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사실~~

“태영아, 슈슈는 저세상으로 간 것 같다. 묻어 주러가자.
랜턴 가지고 나와라, 아빠는 삽 찾아 올테니~~“
엘리베이터에서 작은놈을 만나 간단히 설명 후,
개를 묻고 왔다.

늦은 저녁에 슈슈를 위한 기도도 함께 올리고~~
한바탕 훌쩍이고 눈물을 훔쳐대다가 세 식구 모두
억지로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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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잠에서 깨면서~

아!, 이 녀석 이젠 어른 방, 아이 방 왔다갔다하며
사람들 재촉하지 않는구나~~
찌르르~ 가슴깊은 곳이 저려왔다.

정말이지 개가 개가 아니구나.

어쩌나~~
아무렇지 않은 냥 아이들 방으로 가서
오늘은 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들을 깨운다.
“큰 아들!, 작은 아들! 7시 반이다~~ 일어나라!”

그나저나
오늘저녁 출장에서 돌아오는 집사람은 또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