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사람이야기

소주 한 박스

언덕위에 서서 2009. 8. 13. 16:50

1.

'97년.

하루 전까지 군인 신분이었던  사람(?) (군인은 사람 아니다.)이,

다음 날 뻘건 옷 입고 임용 신고하려니까~~~

많이 어색했다.

고참 소령이 한 끗발 깍여, 소방 계급장 달고 신고하는 것 때문에.

 

임용이라는 어휘도 그랬다.

관에서는 간부(5급 이상), 비간부 할 것 없이 "임용"이라는 어휘를 쓰던데

군에서는 그도 조금 다르다.

장교는 "임관" 이라 하고, 부사관의 경우 "임용"이라는 어휘를 쓰는데

장교 임관한지 20년 된 놈이 뭘 잘 먹고 살겠다고 

재삼 " 임용 신고인가 ?" 하는 자괴감.

 

거기다, 군인 출신이니, 절도 있게 신고하란다.

(절도의 정도도 군과 관이 많이 달랐다.)

 

임석 상관이  지사셨던 것 같은데~~ 

군대식 절도를 선 보이니~~ 신고 받는 사람

입이 굳어져 버렸다.

 

 

신고하는 놈들이~~

두 눈 부릅뜨고, 사무실이 터져 나가라 소리를 질러대며,

손 끝이 파르르 떨리도록  거수 경례를 올려 붙히니~~

그이도 분위기에 눌려 순간적으로 군기가  들어 버렸었다. 

옆에서 보는 이들, 모두 다 어쩔 줄 모르고.

 

그렇게 소방관으로 변신했다.

( 그 후 12년 되도록,  우리처럼 신고하는 모습, 한 번도 못 봤다.

대충 웅얼, 웅얼대다 말지~~)

 

 

2.

 며칠 지나자, 항공대 창설 작업 끝이란다.

격납고 짓고, 헬기 한 대 사 놓고,

조종사, 정비사 뽑아 줬으니 할 일 다했다고~~

(하긴 그것만으로도 무지 고생했을 거다. )

 

어라? 수리 부속이며, 정비 장비며, 하나도 없는데?

이래 가지곤 항공대 운영할 수 없다고~~

추가로 해 줄 일 제목만 적었는데 A4지 4장이었다.

 

당시  총수께  보고하니~~

주무 과장을 불러 하시는 말씀,

"이 양반이 하는 얘기, 나는 하나도 알아 들을 수 없으나

(대부분 항공 용어에 영어가 반 넘으니),

그거 없으면 헬기 못 뜬다니, 원하는 대로 다 해주시요" 였다.

하루에 서너 시간쯤 자며 근무한 지 두서너 달 지나자, 겨우 자리가 잡혔다.

 

그 무렵, 그 동안 고생했다고 항공대에 위문품이 왔는데

 

소주 1 박스였다.

 

당시 군 PX에서 물품을 살 수 있었으니

거기서 사면 3천원이었다. 밖에서는 돈 만원 했겠지만~~

그것도 나를 웃겼다.

"내가 아프리카에 취직했구나~~" 하는 자괴감 때문에.

 

 

3.

여기서 산지 12년 째다.

오늘은 퇴근하면서, 소방서 앞에 있는 마트에서

소주 한 박스를 사,  차에 실었다.

 

비오는 날, 청승 맞기도 했지만

한 박스 사가면, 한 동안 필요할 때 마실 수 있으니

좋지~~~

 

이제까지 인생 살며,  잘 못한 점이 있다면

사소한 결정에는 심사숙고 하면서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중대한 결정에는

심하게 콩깍지 씌여,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그걸 모두 무시하고, 내하고 싶은 대로 해 왔다는 점이다.

 

그 결과가 오늘의 내 모습이다.

12년 전~~~

몇 년 빨리 퇴직할 각오하고, 차라리 대한항공으로 갈 것을.

 

그랬으면, 이 비오는 날,  초라한 내 모습 때문에

소주 박스 챙기는 일 없었을 것을~~~ 

 

후~~ 자,  한 잔 더 마시자.

술은 넉넉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