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82년
19820920 대위 항공대학: 청평병원
경희!
청평의 달은 아직도 그렇게 밝은가?
원래도 헤매기 잘하는 나지만, 논둑을 거슬러 불어대는 가을 바람의 冷氣에 이즈음 꽤 초조하고 당황해 있나보다.
왜 그렇게 갈팡질팡 하는가?에 대한 명백한 이유를 찾을 수 없어
더 미칠 것 같고, 그런 나를 어쩌다 인식하게 되면 그게 또 웃기더군.
언제까지 이래야 하려는지, 하기야 이젠 많이 교활해져서 이런 중에서도, 내가 어떻게 자신을 속이며 황량한 체 하고 있는가를 감지하곤 하지만...
이젠 좀 빈틈없고 휘청거리지 않았음 좋겠다.
-하여, 이젠 주기(週期)가 끝난 듯하여 책을 잡고 앉을 수 있다.
매일 봐도 낯설긴 매 일반인 R,L,C와 S와 σ와 Laplace와 pole, zero, circuit라는 단어들이지만---물론 네가 자주 쓰는 誠實이라는 어휘와는 거리가 먼 상태의 탈진하고 조용할 뿐인, 그런 상태이지만,
그라고 가서 널 껴안지 못하는 건, 그런 나 자신에 대한 自信이 없었기 때문이었구, 그런 날 네가 웃을 거란 강박관념? 때문이었을 게다.
하여간, 괜찮다. 이게 나니까. 하나쯤 이 지구상에 이런 놈 하나 있는 걸 송구스러워 하지 않아도 누가 심하게 욕 하지야 않겠지?
흔들릴 때 마다 한잔씩
포장 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독하게 한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죽은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는 꾼이 한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수병에 얼키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 수 없이, 다만 다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 김태준의 詩 ‘흔들릴 때마다 한잔씩--
82.9.20 광수
19820930 (엽서) 대위 항공대학: 청평병원
경희씨!
산 따라, 물 따라 설악동에 와서
‘ 더 오를 곳이 없으니 부러울 것도 없다’고
남들 욕하는 것쯤 개의치 않다가
- 다 늙게 무슨 수학 여행이냐구-
엽서를 사고, 경희씨 생각이 나서
몇 자...
오후엔 원주에 있게 될 텐데
거기서 경흴 봐두 좋구...
82. 9.30 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