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위에 서서 2006. 1. 2. 16:17
 

19820920  대위 항공대학: 청평병원

경희!   

청평의 달은 아직도 그렇게 밝은가?

원래도 헤매기 잘하는 나지만, 논둑을 거슬러 불어대는 가을 바람의 冷氣에 이즈음 꽤 초조하고 당황해 있나보다.

왜 그렇게 갈팡질팡 하는가?에 대한 명백한 이유를 찾을 수 없어

더 미칠 것 같고, 그런 나를 어쩌다 인식하게 되면 그게 또 웃기더군.

언제까지 이래야 하려는지, 하기야 이젠 많이 교활해져서 이런 중에서도, 내가 어떻게 자신을 속이며 황량한 체 하고 있는가를 감지하곤 하지만...

이젠 좀 빈틈없고 휘청거리지 않았음 좋겠다.


-하여, 이젠 주기(週期)가 끝난 듯하여  책을 잡고 앉을 수 있다.

매일 봐도 낯설긴 매 일반인 R,L,C와 S와 σ와 Laplace와 pole, zero, circuit라는 단어들이지만---물론 네가 자주 쓰는 誠實이라는 어휘와는 거리가 먼 상태의 탈진하고 조용할 뿐인, 그런 상태이지만,

그라고 가서 널 껴안지 못하는 건, 그런 나 자신에 대한 自信이 없었기 때문이었구, 그런 날 네가 웃을 거란 강박관념? 때문이었을 게다.

하여간, 괜찮다. 이게 나니까. 하나쯤 이 지구상에 이런 놈 하나 있는 걸 송구스러워 하지 않아도 누가 심하게 욕 하지야 않겠지?

  

        흔들릴 때 마다 한잔씩

 

      포장 술집에는 두 꾼이, 멀리 뒷산에는 단풍 쓴 나무들이      

      가을비에 흔들린다, 흔들려,

     흔들릴 때마다 독하게 한잔씩,

     도무지 취하지 않는 막걸리에서 막걸리로,

     소주에서 소주로,

     한 얼굴을 더 쓰고 다시 소주로,

     꾼 옆에는 반쯤 죽은 주모가 죽은 참새를 굽고 있다.

     한 놈은 너고 한 놈은 나다,

     접시 위에 차례로 놓이는 날개를 씹으며

     꾼 옆에는 꾼이 한없이 떠도는 마음에  또 한잔 


     젖은 담배에 몇 번이나 성냥을 댕긴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포장 사이로 나간 길은 빗속에 흐늘흐늘, 이리저리 풀리고,

     풀린 꾼들은 빈 수병에 얼키며 술집 밖으로 사라진다.

     가뭇한 연기처럼 사라져야 별 수 없이, 다만 다같이

     풀리는 기쁨,


      멀리 뒷산에는 나무들이 손 쳐들고 일어서서

      단풍을 털고 있다.

            -- 김태준의 詩 ‘흔들릴 때마다 한잔씩--

                             82.9.20 광수


19820930 (엽서)  대위 항공대학: 청평병원

  경희씨!

  산 따라, 물 따라 설악동에 와서

  ‘ 더 오를 곳이 없으니 부러울 것도 없다’고

  남들 욕하는 것쯤 개의치 않다가

  - 다 늙게 무슨 수학 여행이냐구-

  엽서를 사고, 경희씨 생각이 나서

  몇 자...

  오후엔 원주에 있게 될 텐데

  거기서 경흴 봐두 좋구...

            82. 9.30 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