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위에 서서 2006. 1. 2. 16:13
 

19820608  대위 항공대학: 청평병원

  담배 한 가치를 태우고

그래 또 쓰자. 주책없는 짓인 줄 알지만 네가 내 심정 같다면 누구 찾아와 반가이 맞아주고 싶거나 편지라도 한 통 왔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으려니...하는 심정으로,

  여긴 뿌옇게 흐린 달이 있을 뿐이다. 청평의 달이야 높고 싸늘하게 빛나고

이제는 그 달을 볼 때 개구리 소리도 들릴 터이지만, 이 도시의 달은 피곤한 채로 그저 덤덤하게 매달려 있을 뿐이다.

  

  낮엔 국립묘지에 누워있는 내 아는 이름들을 둘러보고 왔다.

전엔 홧김에 한 대씩 쥐어박고 욕도 퍼붓고 소줏집에서 술잔을 함께 기울이기도 했던 녀석들이지만, 지금 그들은 싸늘한 돌로 나를 맞는다.

  그 差異란 무엇인가? 香을 피우고 머리를 숙여도, 대체 나는 그들에게 무엇으로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어떤 모습을 생각해야 서로의 현재의 입장에 적합한 것인지, 그 비석 앞에서 살아있다고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인사하고, 이즈음 어떻게 지내는가를 묻고, 그럼 또 보자고 헤어지는 모습들은, 얼마나 체면스런 헛 몸짓이겠는가고...

  그 앞에서조차 속 시원히 울지 못하는 심정, 아니 운다는 것의 의미는 또 무엇이냐? 너는 죽었고 나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 이건 내게 주어진 네겐 없는 자유고 권리라는 건가?...

  왜 우는가?

네가 내 곁에 있지 않음으로 해서 섭섭한 나 자신을 위해서 운다는 건가?

울고 난 후라야 내 맘이 깨끗이 가라 안고 정리 될 것 같아?   

  이제 곧 삼십세가 될 것이다.

30세가 되고 50세, 60세... 그리고 멀지 않은 장래에 또 그런 절차대로 산 사람들 죽고, 남아있는 사람들 울고... 나고 죽는 것조차 일정한 pattern에 의해 일반화된다면 뭔가 괜히 억울하다.

  커다란 망치와 정을 가지고 높은 산 바위에 이름이라도 새겨놔야겠다.

큼직하게... 뭔가 흔적을 남겨 놓기라도 해야지, 그냥은 너무 아쉽고 슬픈 일일 것 같다. 그 일 외에 뭔가가 있다면 좀 알려다오. 누워있는 녀석들 보고 아깝게 느껴지는 심정이 보상될 만한 어떤 의미심장한 일거리를...


  그래서 오늘 이 도시의 달은 덤덤하게 떠있다. 수십만 번 반복해서 보아온 인간들의 고민하고 우는 모습에 숙달되어 아무런 감흥도, 안타까움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덤덤하게 떠있다.

                                   82. 6. 6  광수


뭔가 정말 쓰고픈 말이 있을 텐데, 온통 이런 회색의 빛깔이다.

 그 쓰고 싶은 말이란,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식의... 하여간 뭔가가 있을 텐데 적을 수가 없다., 

  

19820728  대위 항공대학: 청평병원

  이 여름동안 나는 죽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자, 제일먼저 담배를 피우고 고민하기를 시작했다.  지금은 비가 내린다. 그 비구름 위에 떠 있을 비행기의 폭음이 들려온다. 그 사람은 햇빛을 보고 있지 못한 우리를 비웃고, 자기 혼자만의 만족스러움에 미소짓고 있을 지도 모른다. 거긴 햇빛이 비추고 있을 테니까.


  날아보고 싶다. 너무 오래 날아 보질 못했기 때문에...

이제 겨우 칼라 위로 내 뻗기 시작하는 뒷머리를 잔인하게 쳐내고 또 다시 중위 계급 달린 모자를 쓰고, 행정학교에서 한 주일쯤 지내야 한다. 군복을 입기가 왠지 망설여지지만, 행정학교라면 그건 괜찮다. 내가 너로 인해 대구 분지 그 무덥고 혹독했던 추위마저 괜찮게 느꼈듯이, 거기도 괜찮다. 거기도 네가 있었으니까.

  

  이제 곧 삼십세가 될 것이다. ‘잉게 보르크 바하만’의 ‘삼십 세’가 아니더라도 삼십 세란 나이는 정말 두렵게 느껴지는 나이다. 이때토록,왜 나는 네게서 벗어나지 않을까? 자궁에의 향수 마냥,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서도, 왜 너를 안고 있다고 우기려 하고, ‘이제 그녀는 정말 내게서 자유롭도록 하자‘ 라고 말하는 순간에 이미 그건 지킬 수 없는 약속이고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걸까?

  빗속에,

웃는 여자의 얼굴이 보이고, 추잡한 내 웃음이 함께 보이고 그게 싫어서 머리를 턴다. 결국, 이러다 말 것인가? 정말 그녀는 내가 어떤 종류의 여자를 싫어하듯 그렇게 나완 얘기가 안 되는 사이인가?  그렇지, 싫은 건 어떻게 해서도 안 되는 거지. 인간의 힘으론...  

  내가 나를 어쩔 수 없듯이, 너도 어쩔 수 없겠지, 그 짐스런 자신이라는 껍데기를, 아니 네 경우엔 ‘ 껍질이 아니라 어쩔 수 없도록 맑기 만한 이성(理性)이겠지만...


  한 달 가까이 비어있던 방에 들어서자, 먼지 냄세와 괜한 우울, 서랍을 열자 네 편지가 눈에 띠었다. 매란한 여자가 누구라고 쓴, 그 편지엔 답장했던가?  이런 저런 불만들 모두 끌어 모아 네게 퍼 붓는다.

  비도 내리고, 아직 자신 속으로 침잠함으로서 이런 상태를 정리 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하지도 못하니까.

  8月 중에 한번 보러 가겠다.

                    82, 7.28 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