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위에 서서 2006. 1. 2. 16:13
 

19820510    중위 국군청평병원   


울어본 적이 있니?

울고 난 후의 그 개운함을 알고 있나 물어보는 거야.

울기가 힘들어져 갈 즈음에도.


나의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그리고 넌 황량한 그대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대로이고.

사람들은 여전히 웃음을 좋아하고.

그래서 문득 죽고 싶어질 때도 있고.


청평에 와서 소주가 맥주보다 좋아졌어.

많이 먹진( ? 마시진) 못하지만 가끔씩은 먹고 싶을 때도 있고.

신검 온 대령님의 “ 미쓰 리 ”소리에 다방인 줄 아느냐고

딱딱거리고, 화가 나서 씩씩대고,

그게 부끄러워져서 한 잔 하고.

사실 미쓰 리가 아닌 것도 아니면서.


편지 안 쓸려고 했어.

누가 좋고 나쁜 것에 관심 없고, 항의 할 일도, 보복 할 일도

아니니까.

네 시험에 축복을 보내고 싶어서.

어린애들 틈에 끼여서 너무 감격해 하지 마라.

그네들이 갖지 못한 너만의 소중한 어떤 것으로도 너무 우쭐대지

말고, 가장 솔직하고, 겸손하게, 묵묵히 가다보면

뭔가 만나지는 게 있겠지.

청평 달은 참 밝다.

매란스러운 여자라고 그럴테지 또?


  잘자


    오월칠일 한시 반. 경희


19820525  대위 항공대학: 청평병원

지금은 조금 술 취했기 때문에 웃기는 소리를 적을지도 모른다.

경희!

넌 술을 마시지 말았으면...

내가, 술을 마시게 되면 조울증이 생겨 2주나 3주 정도를 몽상가가 되어 헤매고 엉뚱한 짓거리만 하고 다니다 겨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 때문에, 만일 네가 그러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건 내 城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에,

넌 그대로 있어라. 솔직히 말하라면, 난 너와  결혼하고 싶지만 결혼한 다음의 너에 대한 내가 자신이 없어 더 지독스럽게 네게 대들지 못하는 것이다. 그 대들지 못하는 이유가 술 마신 다음 나처럼 헤매는 널 보는 순간 없어져 버리고, 너와 결혼하고 싶어지지 않고, 네 이미지 전부 사라져 버릴 테니까...

  너와 결혼 하든가, 너 말고 또 다른 경희와 결혼하더라도 - 아니 그녀와도 결혼하지 못하더라도, 하여간 여자를 잴 때 너를 기준으로 재고 있다는 것.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 부정하려 해도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살고 있는 나...를 보고 웃는다.

  여기서 말하는 결혼이란?

  무척 찾아 헤매던 어떤 상징적인 길(way)의 의미를 갖는다. ‘결혼하고 애 낳고...’ 할 때의 의미완 다른...

  황량하다고 그랬지? 애들 틈에 끼여 감격해 하지 말라고, 며칠 전 조교 녀석들과 술을 마시다, 그 비슷한 충고(?)를 듣고는 ‘ 이거 정말 sharp한 눈들이로다. 왈, 육군 중위가 아니고, 한 달에 30만원(정확하게 27만 몇천원) 봉급으로 그 자리 술값 몽땅 계산할 능력 있는, 술친구가 아니라 단순한 대학 3학년으로서 공부 열심히 하는 것, 그게 당면한 과제 아니냐는...?

  감격하고 있다간 널 보러 갈 용기 마저 스러져 버릴게다. 이중으로 욕먹게 될 거고...

  사랑한 경희, 아니 경희라는 단어 말고 너를 전부 생각나게 할 어떤 다를 어휘가 필요하다.

  네 전부를 한꺼번에 몰아, 내게 느끼게 해줄...

  하여간 이경희, 이게 황량하다는 것이냐?


아카시아 향기가 내 방안에까지 퍼져 온다.     

그리고 지금은 5월이다.

더 늙고나면 이 향기, 이 계절이 주는 의미도 잊고 살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이 지금 날 슬프게 하고, 벌써 이 만큼 살아버린 내가 아쉽고, 그렇도록 변함이 없는 네가 아쉽다.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24일 12시쯤  광수